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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와 천지창조

창세기와 천지창조

writer 김성현(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하이든 음악의 절정이라 불리는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이 곡이 탄생하기까지에 관한 이야기.

창세기와 천지창조

  • “바다를 건너는 내내 갑판에 서서,
    바다라는 거대한 괴물을 바라보았다.”

    1791년 신년 정초 아침, 영국 해협을 건너고 있던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이 이런 심경을 편지에 적었다. 예순을 앞두고 있던 작곡가 하이든이 바다를 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고향인 오스트리아 로라우, 유년 시절 성가대원으로 9년간 노래했던 빈의 슈테판 성당, 30년간 악장으로 봉직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영지까지 그의 활동 범위는 중부 유럽을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영지도 북해나 지중해와 맞닿지 않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에 걸쳐 있었다. 작곡가의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니콜라우스 1세 공작이 한 해 전에 숨을 거둔 뒤, 하이든은 뒤늦게 찾아온 자유를 만끽하던 참이었다. 영국 언론들은 하이든을 ‘음악계의 셰익스피어’라고 부르면서 초청 연주회를 열자고 연일 재촉하고 있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후계자인 안톤 공작이 너그럽게 1년간의 휴가를 허용하자, 하이든은 주저없이 영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영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날,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만났다.

    하이든


  • 모차르트는 평소 하이든을 ‘파파(Papa)’라고 부르며 스승처럼 따랐다. 모차르트는 “파파는 커다란 세상에 충분히 적응되어있지 않고, 구사하는 언어도 너무나 적다”면서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듬해 먼저 세상을 떠난 건 24세 연하의 모차르트였다. 이 때문에 이날은 이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하이든은 그해 첫 영국 방문에서 교향곡 작곡가이자 지휘자, 하프시코드 연주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였다. 그해 6월까지 잡혀 있던 12차례의 연주회 외에도 행사 초청이 쏟아지는 바람에 탈진할 지경이었다. 1791년 영국 옥스퍼드대는 하이든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 뒤 하이든은 자신의 이력에 ‘음악 박사’라는 명칭을 쓸 만큼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당시 기념 음악회에서 하이든은 자신의 교향곡 92번을 직접 지휘했다. 그 인연으로 이작품은 ‘옥스퍼드’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1794년에는 작곡가의 2차 영국 방문이 성사됐다. 하이든의 마지막 교향곡인 104번 <런던>은 두 번째 영국 방문의 성과물이었다. 두 차례 영국 방문을 통해 그가 벌어들인 돈은 1만5,000플로린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하이든이 1793년에 구입한 자택 가격이 1,370플로린이고, 사후에 남긴 재산이 5만5,700플로린이니 그가 영국 방문을 통해 얼마나 큰 거액을 벌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말년의 영국 체류는 작곡가에게 음악적으로도 소중한 자산이 됐다. 1791년 5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열렸던 헨델 추모 음악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공연에는 1,000여 명에 이르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참여했다. 왕실 좌석 근처의 박스석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듣고 있던 하이든은 거룩하면서도 웅장한 분위기에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하이든은 “헨델의 음악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어보기 전까지는 그 힘을 절반도 깨닫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듬해 빈으로 돌아온 하이든이 작곡에 착수한 장르가 오라토리오였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독창자가 연주하는 오라토리오는 극적 드라마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오페라와 닮은 점이 많다. 하지만 오라토리오의 줄거리는 남녀의 연애담이나 복수극이 아니라 대부분 성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를테면 ‘종교적 오페라’인 셈이다. 무대에서 공연하는 오페라와 달리 오라토리오는 얼마든지 연출이나 연기 없이 음악회에서 연주할 수 있다는 점도 차이였다. 런던에서 작곡가가 가져온 영어 대본이 <천지창조>였다. 구약성서 ‘창세기’와 존밀턴의 ‘실락원’에 기록된 천지창조와 에덴동산의 모습을 음악으로 구현한다는 야심 찬 구상이었다. 3부 34곡의 대곡인 이 작품은 가브리엘, 라파엘, 우리엘이라는 세 천사의 노래를 통해 천지창조의 과정을 묘사했다. 하이든 자신은 “<천지창조>를 쓰고 있을 때만큼 경건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이 작품을 무사히 끝마칠 힘을 달라고 매일 무릎 꿇고 기도했다”고 고백했다.

“내 언어는 전 세계에서 이해된다네!”

  • 하이든은, 베를린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이자 음악 후원자였던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에게 영어 대본을 건넸다. 영어와 독일어에 모두 능통했던 슈비텐 남작은 <천지창조>의 영어 대본을 독일어로 옮겼다. 그가 번역한 독일어 대사에 맞춰 하이든이 작곡을 하면, 슈비텐은 하이든의 음악에 맞춰 다시 영어 대본을 다듬었다. <천지창조>는 탄생부터 이중 언어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작업 과정은 더디기만 했다. 지금도 이 곡은 영어와 독일어로 모두 연주된다. 1798년 4월 빈에서 초연된 연주회는 사전 매진됐다.

    하이든이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당시 빈의 궁정음악가였던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피아노의 전신에 해당하는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했다. 하이든의 지인이었던 스웨덴 외교관 프레데릭 사무엘 실베르스톨프는 빛의 탄생을 묘사한 작품 도입부에서 작곡가가 보여준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이든은 비밀이나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꼭 깨물고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빛의 탄생을 표현하는 순간이 되자, 작곡가의 불타는 눈에서도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초연 직후 곧바로 5월 초에 두 차례 재공연이 잡힐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 1800년 출간된 <천지창조>의 악보는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갔다. 1808년 3월 작곡가의 76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빈음대에서 열린 기념 음악회에서도 <천지창조>가 울려 퍼졌다. 하이든은 평생 봉직했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이 제공해준 마차를 타고 공연장에 도착했다. 팡파르에 맞춰 그가 연주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관객들은 “하이든 만세”를 외쳤다. 노쇠한 하이든은 1부가 끝난 뒤 부축을 받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이때 제자 베토벤이 찾아와 스승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극장을 나가기 전에 하이든은 청중에 대한 답례로 고개를 돌려 오케스트라석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 공연은 하이든이 참석한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이듬해 5월 그는 빈에서 숨을 거뒀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빈에 입성한 직후였다. 당시 클레망 쉴레미라는 프랑스 장교가 하이든의 집에 찾아와 작곡가에게 경의를 표한 뒤 <천지창조>의 테너 아리아를 이탈리아어로 불렀다. 이처럼 말년에 하이든은 ‘귀족의 하인’이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톡톡히 인정을 받았다. 1790년 하이든이 모차르트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모차르트의 걱정을 달래기 위해 하이든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 “내 언어는 전 세계에서 이해된다네!”

    • ① 하이든의 생가1
    • ② 1808년 빈 음대에서 <천지창조>가 공연된 광경을 묘사한 그림”/><em>2</em></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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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③ 영국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The Ancient of Days)3
      1. ① 하이든의 생가
      2. ② 1808년 빈 음대에서 <천지창조>가 공연된 광경을 묘사한 그림
      3. ③ 영국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The Ancient of 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