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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단해지는 길

더 단단해지는 길

writer 이승엽(세종문화회관 사장)

복싱에서 맷집은 중요합니다. 강한 맷집은 승부를 가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맷집을 길러야 합니다.

  • 철 제련

  • 맷집은 맞으면서 길러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맞는다고 무작정 맷집이 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맞는 데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어 복부냐 턱이냐에 따라 완전히 다릅니다. 복부는 가능합니다. 평소에 쇠공을 배에 떨어뜨리는 훈련을 하는 것은 복부의 맷집을 기르는 차원입니다. 맞으면 맞을수록 강해집니다. 턱은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턱은 맞으면 맞을수록 약해집니다. 달리 맷집을 기를 방도도 없습니다. 한번 약해진 턱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남습니다. ‘유리턱’이라는 별명을 가진 복서들이 꽤 있습니다. 잘나가다가 턱에 한방 맞고 무너지는 일이 생깁니다. 이 약점이 고질이 되면 은퇴해야 합니다.

    얘기를 복싱에서 세상사는 일로 옮겨봅니다. 사람마다 턱에 해당되는 부분이 다릅니다. 부위도 다르지만 사람에 따라 좁거나 넓을 수도 있고 때로는 여러 군데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를 제대로 맞으면 누구나 나가떨어집니다. ‘마음을 굳게 먹어!’, ‘정신력으로 이겨내!’ 라고 주문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무책임한 격려입니다. 맞지 않는 도리밖에 없는데 링에 오른 이상 턱만 완벽하게 방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이도저도 아니면 링에서 내려오면 됩니다. 승부가 거기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 절벽넘기

  • 1년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일을 시작할 때 제게 세종문화회관은 상처투성이의 복서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체급(중량급이죠)에 비해 몸무게는 많이 넘쳤는데도 몸은 부실해보였습니다. ‘턱’에 해당하는 약점도 당연히 있는데 효과적으로 커버하기 어려워보였습니다. 저는 일단 체력을 보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봤습니다. 그렇게 1년을 보냈습니다. 일단은 겉으로 보기에 많이 좋아져보였습니다. 연초에 저는 우리 구성원들에게 금년의 핵심방향은 ‘변화’라고 제시했습니다. 안정이 최종 목표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던 중 일격을 당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맞을 만했습니다) 다운도 당했습니다. 문제는 이 위기를 견뎌낼 수 있느냐 입니다. 세종문화회관에 가해진 충격을 미래를 위해 잘 활용할 수 있느냐 입니다. 이것이 강한 맷집을 기르는 과정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참고 견뎌서 더 나은 공공예술기관으로 거듭나는 자극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비틀거리며 일어나 위기를 기회로 삼아 극복할 방안을 마련하기는 했습니다. 이번 일이 없어도 추진하려고 했던 ‘변화’ 프로젝트가 중심입니다. 저희는 이 프로젝트를 ‘재생 프로젝트’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더 단단해지는 길이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뿐입니다. (그 반대도 가능하니까요)

    이번 사건은 제 개인으로도 충격이 컸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주변 사람들이 제게 ‘맷집 좀 키웠겠는데?’ 합니다. 제법 큰 규모의 공공예술기관의 사장으로 링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꽤 맞았습니다. 오랜만의 실전이 실감나는 나날들입니다. 그때마다 아팠지만 견딜 만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도 이것이 맷집을 기르는 과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맞은 데가 턱이 아니고 복부여야 합니다.

    아, 제가 맷집 얘기만 했군요. 죄송합니다. 이번에 세종문화회관에 실망하신 많은 분들께 사과드립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세종문화회관이 사건 사고가 아니라 문화예술쪽 이슈로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